우정 by gyudae

'허수아비'(1973)에는 도저히 인생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두 패배자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떠돌이 삶을 전전하는 사기 전과자 맥스와 전직 선원인 라이언은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하여 피츠버그에 세차장을 차리자고 계획한다. 그러나 라이언은 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고, 맥스는 의식이 없는 라이언의 귀에 "너를 돌봐줄게. 반드시 돌아올게."라고 말한 후 피츠버그로 떠난다. 바로 그 둘의 우정이 나에게 인간이 속물화와 동물화 과정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었다. 주인공 맥스는 일명 '텅 빈 우정'이라고 부를 만한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예시한다. 텅 빈 우정이란, 약속이라는 수단 그 자체에 충실한 우정이다. 약속이 목표한 바를 실현하는 것이 불확실하고 심지어 불가능할지라도 약속의 말과 행동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감행한다. 맥스는 그의 곤궁한 처지로 보건대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복표를 구매한다. 영화는 맥스가 신발 뒤축에 숨겨 놓은 돈까지 탈탈 털어 왕복표 값을 지불한 후 뒤축을 바로잡기 위해 매표소 테이블 위에 신발을 두들겨 대는 장면으로 끝난다.

텅 빈 우정의 현실성은 친구를 '실제로' 돌봐 줌, 친구를 위해 '실제로' 돌아옴에 있지 않다. 그 우정의 현실성은 차라리 기차역에서 신발 뒤축을 두들기던 바로 그때 맥스가 짓던 난처한 표정, 그의 구차한 몸짓에 있다. 그 우정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가 기꺼이 감내하는 수치와 기어이 감행하는 행동을 통해 증명된다. 이 텅 빈 우정은 조르조 아감벤이 정의한 우정의 의미와 상통한다. 아감벤은 우정을 "자신의 고유한 존재감 속에서 친구의 존재를 함께-지각"함이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우정은 출생, 법, 장소, 취향의 나눔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사실, 삶 자체의 대상 없는 나눔"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이때의 우정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우정이라고 오해하는 관계, 함께 몫을 늘이고 지분을 나누고 상호 간의 갈등을 줄이고 합의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잠정적'으로 맺은 전략적 파트너십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우정이란 함께 살고 함께 존재하고 함께 지각하는 것, 그 자체가 좋고 즐겁기 때문에 맺는 타인과의 관계이다. '허수아비'에서 맥스는 애초에 세차장이라는 공통의 비즈니스를 위해 라이언과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라이언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후 맥스와 라이언의 관계는 전략적인 파트너십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우정의 상태에 이른다. 맥스는 라이언과 함께 있는 것, 그를 돌봐 주는 것, 그러기 위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 자신의 존재에 적합성을 띠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좋고 즐겁게 하기 때문에,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과연 친구를 도와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왕복표를 구매한 것이다.

타인과 함께 삶을 나눌 때, 인간은 '말'("너를 돌봐 줄게.")와 '행동'(기어이 돌아오려 함)을 통해 '가까스로' 자신의 존재를 보다 나은 존재로 갱신하고 고양시킨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내포한다. 텅 빈 우정의 정치는 친구와의 약속을 위선과 허세로 축소시키는 속물화의 강박에 저항하며, 동시에 친구와의 약속을 엄두도 못 내게 하는 동물화의 압력에 저항한다. 또한 텅 빈 우정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존재라 바라보며 그 곁에 머물려 하는 윤리적 태도를 보여 준다.

- 심보선, '우정으로서의 예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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